— 좌우 떠난 기득권자들, 젊은이들을 이야기 밖으로 몰아내고 이야기 강변
— 이야기 밖으로 쫓겨난 젊은 불나방들, ‘기득권국가’ 애먹이는 행보 본격화
서사(이야기)는 대개 기득권자들의 프레임이다. 성경도, 불경도, 코란도, 아담스미스의 <국부론>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도 결국 다 마찬가지다.
기득권자들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 이야기가 제시하는 ‘기승전결’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고,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름 합리적인 인과관계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기를 바란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열심히 노력하면 부와 행복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기본 사고방식에 장착이 되면, 사람들은 알아서 그 이야기가 정한 방식에 따라 살아간다.
그래야 기득권자들이 명분있는 기득권을 당당하게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래야 공동체 통치자들은 굳이 무력을 항상 동원하지 않고도 아주 쉽게 공동체를 통치할 수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안정적이고 강력한 통치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최근 암호화폐 투자 열풍에 대해 “암호화폐는 금융자산으로 볼 수 없으며, 투기 대상에 불과한 잘못된 길”이라고 단언하자, 젊은 투자자들이 그의 해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은성수 위원장은 “암호화폐는 인정할 수 있는 화폐가 아니며, (제도권에) 좀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개인적 견해를 밝혔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투자한다고 해서 (암호화폐 투자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젊은 투자자들이) 잘못된 길로 가면 어른들이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고도 했다. 금융 당국이 암호화폐 투자자 보호에 나설 계획은 현재로선 없으며, 코인 투자는 20~30대 중심의 ‘치기 어린 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은 위원장은 정부가 금융의 일환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암호화폐 거래 차익에 내년부터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림을 사고 팔아도 양도차액이 있으면 세금을 낸다. 기획재정부는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생각에서 그런 법을 만든 것 같다”고 답변했다.
구윤철 국무조정실장도 지난 16일 “가상자산의 가치는 누구도 담보할 수 없고, 가상자산 거래는 투자라기보다는 투기성이 매우 높은 거래이므로 자기 책임하에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를 이용한 유사수신, 사기 등 불법행위 가능성이 커지자 주무부처 장관들이 짜증이 많이 난 표정이다.
국가의 중앙은행이 발행한 법정통화(Legal Currency)도 아닌 것이, 최초에 국경을 넘은 피자 한 판 결제가 실제 이뤄지면서 시작된 비트코인의 위력이다. 바야흐로 지구촌에서 하루 수백조 달러 거래되는 투자수단이 됐다. 도대체 이 말(이야기)같지도 않은 현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른’ 은성수 위원장이 보기에는 가상화폐 현상은 이야기 자체가 안 된다. ‘금융공학’과 ‘경제학’이라는 이야기에 익숙한 은성수 위원장의 눈에는 그저 철 없는 아이들이 ‘분신사바’ 놀이하듯, 그냥 주문을 외며 놀이하듯 귀한 자기 재산을 갖고 하는 도박놀음일 뿐이다.
은성수 위원장이 20대 시절 당시 동년배들은 이렇게 철 없지 않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고 자라며 강한 정신력으로 국가와 가정을 일궈 낸 베이비부머로서 암호화폐에 투자하는 철 없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적잖은 고통일 것이다. 자신이 지득한 정교하고 수준 높은 이야기의 서사구조를 이해할 리 만무한 애송이들이 아무런 경험도 논리도 없이 많은 돈을 암호화폐에 투자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기에는 관복의 무게와 공명심이 허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은성수 위원장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가상화폐 투자에 뛰어든 젊은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처지에 있고, 어떤 처지가 불나방 같은 투자로 그들 자신을 내몰았는지를 구체적으로 모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은 위원장이 불나방 같은 젊은 투자자들이 처절하게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점이다. 자신이 평생을 신뢰하며 살아온대로,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과관계에 의해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강한 믿음이다.
요컨대 은 위원장은 젊은이들이 불나방 투자에 내몰린 내막을 모르고 있고, 시간과 역사에 대한 철학적 도그마에 갇혀 있다.
윤소평 변호사는 한 매체에 소개한 ‘가상화폐에 돈이 몰리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에서 “젊은 이들이 주식이나 부동산 등 전통적인 투자방법으로는 계층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 소득상태로 또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 상태로 인생한방을 노리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윤 변호사는 “부동산 투자는 대출 길이 막혔고, 대출이 가능해도 돈 될만한 부동산은 가격이 이미 천정부지일 정도로 부동산은 부자들의 돈벌이 판이 돼 버렸다”면서 “소액으로도 벼락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 적은 돈, 큰 돈 가릴 것 없이 코인 투자에 몰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변호사의 말은 현실을 설명하는 데 한치의 빈틈이 없다. 물론 은성수 위원장의 자녀는 이런 부류의 젊은이가 아닐 수도 있다. 시급+알파인 일자리 이외에는 하늘의 별따기인 정규직 일자리, 높은 주거비에 가불한 학자금 원리금 상환 부담, 한계저축성향이 0에 가까운 상황에서 노후준비는 고사하고 자산형성은 꿈과 같은 용어다.
가로등의 강렬한 빛의 파장에 이끌린 불나방은 새벽녘에 서식지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인간의 가로등은 불나방이 집으로 돌아가 쉬고 다시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다시 일터로 나오는 생태본능을 완전히 망쳐 놓았다.
불나방이 어느날 문득 생각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좌표가 아닌 무한한 깊이를 가진 두터운 시간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란 단절된 현재가 아닌 무수한 과거와 무수한 미래가 공존하는 시간으로서의 현재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과거로부터 특정한 포맷으로 구성된 ‘이야기(서사)속에서의 ‘현재’만 중요한 시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매 순간의 ‘현재’들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과 깊이를 지닌다. ‘현재’란 원래 무한한 깊이를 지닌 것임에도, ‘이야기’ 속에서 제시되는 시간은 그 이야깃 속 기득권자들에 의해 ‘현재’의 의미를 고정시켜 버린다.
들뢰즈의 맥락에서 은성수 위원장이 그 기득권자다. 그에게 금융은, 화폐는, 이자는, 배당은, 양도차액은, 세금은 정교한 이야기 속에서 합리적으로 인과관계를 맺는 요인이다. 은 위원장의 이야기대로만 산다면 마치 누구에게나 그런 요인들이 골고루 향유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자신과 부모가 소득과 재산이 많지 않은 2030 젊은이들에게 금융.화폐.이자.배당.양도차액.세금은 닿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개념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완전히 이야기 밖으로 몰아낸 ‘기득권자들의 국가’를 인정할 수 없었다. 국가를 넘어 등가성을 보증하는 암호화폐가 결제수단이 됨을 확인하는 순간, 궁색하고 너절한 말 섞을 필요도 없이 베이비부머 기득권자들에게 빼앗긴 것을 ‘보상(atonement)’ 받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은성수 위원장은 개인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야기, 이호예병형공(관료 버전)과 독점자본(민간 버전), 정경유착(융합 버전)이 빚어낸 여러 기득권자들이 합의한 ‘이야기’를 추종하는 모든 세력들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은성수 위원장을 해임하든 말든 달라질 게 별로 없다. 은 위원장이 계속 자기 이야기만 중시하고, 대다수 불나방들의 피끓는 사연을 공감하지 못한다면, 이제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판이 벌어질 것이다.
새 이야기는 무궁한 가능성과 미지의 가치를 담고 있다. 좌우 진영, 진보-보수의 문제를 넘어선 것들이다. 이는 이야기를 만들어 그 이야기의 맥락으로만 ‘현재’를 정의하고 이를 근거로 미래를 재단하려는 철학적 방법론의 총체적 실패를 의미한다.
좌우가 모두 기득권자가 된 한국사회에서 드디어 사람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들뢰즈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통념을 깨고 “인간은 대부분 일상의 삶에선 결코 깊이 사유하지 않는다.그 일상을 뒤흔들거나 다리 걸어 넘어뜨리는 일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생각을 시작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