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떠난 4대그룹 복귀도 혁신안 실천 속도에 달려
재계 위상 회복을 위해 조직 혁신을 추진해 온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이번 주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출발한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 당시 전경련을 매개로 한 정경유착의 실상이 드러나 홍역을 치른 만큼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하는 것이 새로 출범하는 한경협의 최대 과제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전경련에 등을 돌린 4대 그룹(삼성·SK·현대자동차·LG)이 한경협에 실질적으로 합류하는 것도 한경협이 '과거와의 단절'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이행하느냐에 달렸다는 관측이 나온다.
◇ "초심 돌아가겠다"…55년 만에 초기 명칭 '한경협'으로
20일 재계에 따르면 전경련은 오는 22일 임시총회에서 기관 명칭을 한경협으로 변경하는 안건을 처리할 예정이다.
한경협은 처음 등장하는 명칭이 아니라 1961년 전경련의 전신으로 설립된 경제단체의 이름이었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 등 기업인 13명으로 출발한 '1기 한경협'의 이름에는 '나라를 올바르게 하고 백성을 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경국제민(經國濟民·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의 '경제'에 사람 인(人)을 붙여 단체 명칭을 만든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다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1968년 회원사가 전국 각지 160여개 기업으로 늘자 변화한 상황을 반영해 지금의 '전국경제인연합회'로 이름을 바꿨다. 55년 만에 다시 한경협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새로 출범하는 전경련의 후신이 다시 한경협이라는 이름을 갖는 것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라는 게 전경련의 설명이다.
이번 총회에서는 전경련 산하 연구기관이었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을 한경협으로 흡수 통합하는 안건도 처리되며, 류진 풍산그룹 회장을 한경협 회장으로 선임하는 절차도 진행될 예정이다.
올 2월부터 6개월간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을 맡았던 김병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은 상임고문으로 한경협 활동을 이어갈 전망이다. 현재 공석인 상근부회장에는 외교부 관료 출신인 김창범 전 주인도네시아 대사가 선임될 것으로 예상된다.
◇ '국정농단 트라우마' 넘어야…정경유착 차단할 제도적 장치는
전경련은 재계의 맏형 격으로 정부와 재계 간 소통 창구로 기능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다. 그 과정에서 국정 운영에 협조한다는 취지로 정부 요구를 받아 기업에 사실상 '강요성'인 기금 갹출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 병폐가 곪아 터진 계기가 박근혜 정부 시절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출연금 문제다.
정경유착으로 조직의 근간이 휘청거린 상황을 겪은 전경련은 문재인 정부 시절 '패싱'에 가까운 수준으로 소외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일·한미 정상회담에 동행할 경제사절단을 이끄는 등 위상 회복을 노리고는 있지만 국정농단 사태가 조직에 미친 심리적 충격은 상당했다.
전경련이 앞서 지난 5월 명칭 변경 등을 포함한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정치권력과 유착 가능성을 차단할 제도적 장치를 두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핵심적인 실천 방안 중 하나가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윤리경영위원회 구성이다.
윤리경영위는 전경련 집행부와 사무국이 추진하려는 특정 사업이 회원사에 유무형의 외압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적정성을 심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예컨대 정부와 관련된 기금 출연 등은 반드시 윤리경영위 심의를 통과해야만 사업 집행이 가능한 수준으로 권한을 부여할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 산하 연구기관이었던 한경연을 한경협으로 흡수 통합해 '싱크탱크형 경제단체'로 정체성 전환을 꾀하는 것도 정치권력과 거리를 둔다는 방향성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기업 관련 현안이 발생한 후에야 수동적으로 대응하던 기존 태도에서 벗어나 선제적으로 정책을 개발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국내외 전문가 네트워크를 강화해 인플레이션 방지법(IRA)과 같은 현안이 발생하면 신속히 대응하는 등 글로벌 이슈 대응과 회원사 지원으로 역할을 재정립한다는 구상이다.
◇ 아직 부족한 사회적 신뢰…4대그룹 복귀도 혁신 실천에 달려
문제는 이 같은 혁신안이 본격적으로 실천되는 단계가 아니어서 전경련의 혁신 의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전경련의 후신인 한경협 가입을 검토 중인 4대 그룹도 이런 문제 때문에 실질적인 회원사로 활동할지를 놓고는 아직 고민이 크다.
일단 4대 그룹은 이번 총회를 계기로 한경협의 형식상 회원사로는 이름을 올릴 전망이다.
이들 그룹은 국정농단 사태 이후 전경련에서는 탈퇴했지만, 산하 연구기관인 한경연에는 주요 계열사들이 회원사로 남아 있었던 터라 한경연이 한경협으로 흡수 합병되면 자동으로 회원 자격이 승계된다. 4대 그룹은 이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히지는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전경련 총회 전날인 21일 한경연 회원사였던 5개 계열사(삼성전자·삼성SDI·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증권)가 이사회를 열어 한경협으로의 회원 자격 승계에 관한 입장을 최종 정리할 계획이다. SK와 현대차, LG도 자체적으로 이와 관련한 검토 절차를 거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회비를 납부하고 한경협에서 특정 직책을 맡는 등 진정한 의미의 회원사로 합류하는 데까지는 다소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정경유착 고리를 끊겠다는 명분으로 전경련을 탈퇴한 4대 그룹이 후신인 한경협 활동에 동참하려면 탈퇴 명분을 충분히 해소할 여건이 조성돼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도 전경련이 내놓은 혁신안을 '선언적 의미' 정도로 평가하면서 "한경협이 과연 정경유착의 고리를 완전히 단절하고 환골탈태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준감위는 삼성이 한경협에 가입하더라도 정경유착이 발생하면 즉시 탈퇴하라고 권고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4대 그룹이 전경련 탈퇴 당시 내세운 명분이 완전히 해소됐다고 하기 어렵다"며 "다만 전경련도 그런 전철을 밟았으니 정치적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활동할 것이고, '이 정도면 전과 확실히 달라졌다'라는 판단이 서면 4대 그룹도 본격적으로 합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22일 총회에서 한경협 회장으로 공식 선임되는 류진 풍산그룹 회장은 이처럼 무거운 과제들을 안고 임기를 시작하게 됐다. 앞서 전경련이 내놓은 혁신안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면서 4대 그룹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신뢰를 이른 시일 안에 끌어낼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린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