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대 세무사회장 선거를 한다는 것은 조세전문자격사 단체인 한국세무사회의 역사가 60년이 훌쩍 넘었다는 얘기다. 그런 세무사회가 참 이상한 선거를 하고 있다.
모든 전문자격사단체들이 실시하는 전자(모바일)투표를 하지 않는데다, 지금까지 매 선거 때마다 실시해 오던 소견발표도 없애버렸다.
더 이상한 것은 후보들의 공약을 삭제하는 구시대적 관행을 여전히 고수한다는 거다.
그래서 일부 세무사들은 이번 선거에서는 홍보물에서 삭제된 게 많은 후보를 택하는 역발상으로 투표를 하겠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하는 형국이다. 세무사만이 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업무 기반을 만들어 AI시대에 살아 남아야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웃지 못할 이런 얘기가 회자되는 곳이 1만5천 세무사가 모인 세무사회다.
2년 전 세무사회장 선거에서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저질러진 홍보물 삭제 행태를 보면 세무사회 선거가 얼마나 시대에 역행하고 퇴행적인지 여실히 알 수 있다. 자신들 편이 아니면 아무리 세무사 위상을 높이고 업무를 확대하는 공약이라도 ‘실현불가능’ 등 갖가지 이유를 들이대며 삭제의 칼날을 들이댄다.
올해도 일부 후보의 경우 중요한 공약의 많은 부분이 삭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견발표회 마저 없는 상황에서 과연 회원들이 삭제된 소견문과 홍보물을 보고 세무사의 미래를 책임질 유능한 일꾼을 뽑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
표 <2번 홍보물>은 2년 전 세무사회장 선거에서 모 후보가 내건 회원 먹거리 창출 공약으로 삭제 전과 삭제된 후의 모습이다. 삭제된 9가지가 실현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삭제의 명분이 ‘실현불가능’이라고 하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외부회계감사대상 중 자산기준(현행 120억원, 매출액 100억원 부채 70억원 종업원수 100명) 등을 상향하고 조정계산서로 대체하고, 공동주택 회계감사를 조정계산서나 성실신고로 대체. 고시회 출신 청년세무사 세무공무원 특채, 국세청 콜센터 세무사회에서 운용 등이 왜 실현 불가능한 공약인가.
왜 선관위는 그런 판단을 해야 했을까. 이런 공약을 제시한 후보가 당선돼 실현되었다면 세무사들의 위상이 올라가고 그 혜택 또한 엄청나게 컸을 것이다. 무작정 실현불가능이라고 자의적으로 판단해 공약을 삭제해 회원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이 선관위의 업무인가.
3번 홍보물의 삭제 건은 더 황당하다.
상속세신고수수료 정당한 비용 인정, 국세심사위원에 변호사를 제한하고 한국세무사회 인재풀로 운영 및 지역회장 추천받아 위촉, 국세행정의 동반자로서 국세청과 세무사회 핫라인시스템 구축 운영 등 참신한 공약들이다. 아무리 뜯어보고 읽어봐도 도대체 실현 가능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무사회장이 아니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는 후보자의 경우도 출마에 앞서 많은 고민 끝에 공약을 만든다. 실현 불가능한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60여 년 한국세무회장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의 공약 중 단골 메뉴는 조세소송대리권 확보였다. 당선을 위해 번번이 주장했지만 시도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게 실현불가능한 공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이지만 선거캠프에서 지켜본 바로는 세무사회장에 출마한 후보들은 나름의 덕망과 능력을 겸비하고 오랜 기간 세무사무소를 운영한 경험을 토대로 공약 하나하나도 숙고에 숙고를 거듭해서 내놓았다.
주변 세무사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씩 검토하고 실현가능성까지 고민한 끝에 공약으로 만들어 회장에 출마하는 것이다. 당선되면 기필코 성사시킨다는 각오를 갖고 출마를 결정하지, 무작정 세무사회장 한번 해보겠다고 허무맹랑한 공약을 만들어서 나설 후보가 과연 있겠는가.
이런 각오와 소신을 바탕으로 세무사 업무를 늘리고 세무사제도를 발전시키겠다고 만들어낸 공약이 상대후보의 이의 제기와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속된말로 ‘묵사발’이 된다면 후보자가 어떻게 선거를 치르겠는가. 공약의 실현가능성 여부는 유권자인 회원이 판단하는데, 참으로 이상한 선거관리가 아닐 수 없다.
유권자는 사람을 보고 뽑는 게 아니라 후보가 제시한 공약이 얼마나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가를 따지고 실현 가능성까지도 판단한다. 그 공약이 실현가능한지를 세법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인 세무사가 판단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판단을 유권자에게 맡기는 것은 공직선거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든 국회의원 선거에서든 모두 동일하다. 심지어 상대 대선후보를 공격하며 공약에 ‘공산주의자’라는 표현을 써도 용인된다.
가정의 상황이지만 2년 전 모 후보의 공약을 보고 유권자들이 그 후보를 선택해 당선되고, 그런 공약이 실현에 옮겨졌다면 아마도 세무사의 업역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국세청은 이미 AI시스템을 도입해서 모든 신고를 하고 있다. 세무사의 업무영역을 줄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챗GPT와 같은 생성형AI가 활성화될 경우 대체 직업군 4위에 세무사가 올랐다는 조사결과가 보도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세무사회는 언제까지 특정인과 특정세력이 선거판을 좌지우지하고 회의 권력 차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지 한심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후보자의 소신을 꺾는 홍보물 칼질과 공약 삭제의 구태가 계속되는 한 능력 있는 세무사회 리더를 뽑을 수 없고 세무사회의 밝은 미래도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남은 선거기간 만이라도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선거관리를 기대하며 선거에 출마한 모든 후보의 건투를 빈다.
<박연종 세무사.전 한국세무사회 홍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