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7:34 (금)
30년 ‘대중공포증’ 극복하고 명강사·기부천사 된 이봉구 세무사
30년 ‘대중공포증’ 극복하고 명강사·기부천사 된 이봉구 세무사
  • 이대희 기자
  • 승인 2022.12.19 11:18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터뷰] 세무법인 석성 경기북부지사 이봉구 대표세무사
-“가난으로 중학교 진학포기 설움딛고 이룬 대학강단 첫 강의, 평생 못 잊을 기억”
-9천만원 장학금 지급, 매출 1% 장학재단 기부…아너소사이어티 가입해 기부 지속
초등학교 졸업식 때 중학교 진학을 못해 펑펑 울었던 지독한 가난과 대중공포증을 극복하고 대학 강단에 섰을 뿐 아니라 기부천사로 거듭난 이봉구 세무사가 치열했던 자신의 삶을 얘기하면서 "나 자신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며 웃어보이고 있다. 사진 뒷쪽에 '사랑의 열매 아너소사이어티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약정' 표시물이 놓여 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펑펑 울었다. 어린 마음에도 등록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너무 서러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짐했다. ‘반드시 성공한다. 고학으로라도 언젠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강단에 서서 오늘 내가 울던 얘기를 해 주겠다’고.”

40년 뒤 어려운 학생들에 거액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기부천사가 되고, 대학 강단에서 자신의 살아온 삶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이봉구 세무사(세무법인 석성 경기북부지사 대표세무사) 얘기다.

어릴 적 신림동 달동네 무허가 판잣집에 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강제로 성남시 ‘철거민 이주촌’으로 쫓겨났다. 성남 지역에 조성된 빈민 집단이주지로 미흡한 도시계획과 생업 곤란 등 각종 문제점이 노출돼 1971년 ‘8·10 성남(광주대단지) 민권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그 시절 밥 굶는 날이 다반사였고 열악한 환경의 이주민들이 시위하는 걸 보고 자랐다”면서 “굶주림의 공포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했다. 이봉구 세무사는 굶주림과 무지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제3세계 국가에 학교 지어주는 후원을 계획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가난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대중공포증’은 젊은 시절은 물론 중년 때까지 30여 년간 그를 괴롭혔다. 남들 앞에만 서면 벌벌 떨며 말을 못하던 그를 박사학위(회계·세무학)까지 취득하고 오늘의 ‘명강사’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세무사로 바꿔놓은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40년 전 다짐했던 꿈을 처음으로 이룬 10여 년 전 한국항공대 첫 강의가 지금도 선하다”는 그의 눈에 아련함이 묻어났다.

“강의가 끝나고 저녁을 사겠다고 하니 학생들이 감동 받았다며 32명이나 참석해 동료 교수들조차 놀랄 정도였다”며 “평생 못 잊을 행복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6개월 치 강의료 전액 300만원에다 200만원을 보태 500만원을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첫 기부였고 봉사하는 삶의 시작이었다. “정말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그렇게 시작하다 보니 2018년 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 1억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 회원에도 가입해 지속적인 기부에 나설 수 있었다. 어렸을 때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으니까....”

지난 5월에도 한국항공대학교에 장학금 1천만원을 기부했다. 이봉구 세무사는 항공대 최고경영자과정인 CEO아카데미 2기 졸업생이다. 항공대 겸임교수를 맡은 2012년부터 지금까지 약 1억여원의 장학금을 기부하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공부를 이어갈 수 있게 돕고 있다. 또 자신의 세무법인 매출액 1%를 석성장학재단에 기부하고, 다른 개인적 기부도 이어오고 있다.

고양지역세무사회장을 역임하고 ‘세무조사 대처 실무’ 회원 강의 등 전문자격사로서의 봉사도 활발하다.

이봉구 세무사는 고양지역세무사회 회장, 정부 기관.단체의 각종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조세전문자격사로서의 본분에도 충실하고 있다.
이봉구 세무사는 고양지역세무사회 회장, 정부 기관.단체의 각종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조세전문자격사로서의 본분에도 충실하고 있다.

“기부는 훈련이고 습관”…작게라도 하다보면 보람 느껴

세무사 이봉구의 삶에서 ‘기부’는 어떤 의미인지 물어봤다.

“흔히들 여건이 되면 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데 돈은 항상 모자란다. 자리를 잡으면 쓰는 게 많아져 또 여유가 없다고 느낀다”며 “기부는 훈련이고 습관”이라고 답했다.

돈이 많다고 하는 게 아니고 작게라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보람이 되고 계속하게 되는 일종의 중독이라고 말한다. “봉사활동이 됐든 뭐든 직접 해보는 게 중요하다. 설명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첫 강의 후 500만 원을 기부하고 난 뒤 마음의 평화, 뿌듯함, 자부심 이런 게 막 생겨 자꾸 하게 되더라”며 자신의 나눔 경험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기부에 대해서는 “한국세무사회장을 역임하신 석성장학회(세무법인 석성) 조용근 회장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서 나누고 베푸는, 그러면서도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닮아가려 애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탄탄하게 자리 잡은 세무법인을 일구고 ‘유명 강사’ ‘기부 전도사’가 된 적극적 성격의 이봉구 세무사가 30여년을 극심한 대중공포증에 시달렸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정식 중학교 진학을 못한 그는 공장에 다니면서 산업체에 딸린 미인가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학력 인증이 안 돼 검정고시를 별도로 봐야하는, 지금은 정규 학교인 송림고등학교로 바뀐 성남상업전수학교에 다녔다.

이 세무사는 “남녀 공학이었는데 3학년 때 반장을 맡았다. 그런데 학생들 앞에만 서면 덜덜 떨리고, ‘떨지 말아야지’ 하면 더 떨리는 것이었다”며 이때부터 대중공포증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어릴 적 지독했던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았던 것이 트라우마가 됐던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 허깨비에 씌어 10대 후반부터 시작해 20대, 30대, 40대까지 30여년을 고생해야 했다”며 한숨을 내뱉었다. 대중공포증은 공직생활 내내 그를 괴롭혔고 세무사 개업 초기까지 지속됐다.

덜덜 떨다가 지인이 소개해 준 첫 거래처도 놓쳤단다. 파주의 병원이었는데 상담 중 대중공포증 증세가 나타나 옳게 설명을 못하자 얘기를 듣던 원장이 들어가 버렸다.

“치열한 트라우마 극복 노력에 내 안의 잠재능력이 터져나왔다”

“지금은 내 말에 주변 사람들이 빵빵 터지기도 한다. 말 잘한다는 소리도 듣고, 버스 안이나 뭐 이런데서 노래도 하고 춤도 잘 춘다. 거의 연예인 수준이 된 것 같다”고 자신감을 내보인다.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피나는 노력 덕분이다. 세무사 초창기 ‘나가서 밥이나 먹고 살겠냐’는 소리에 자극 받아 “이래선 안되겠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이겨내자고 마음먹고 부딪혔다”고 운을 뗐다.

강사에 도전하려고 수강생이 많은 학원을 무턱대고 찾아가 원장에게 ‘명강사인데 공짜로 강의를 해보고 싶다’고 뻥을 치기까지 했다. 퇴짜 맞고, 재미없다고 쫓겨나오길 반복했지만 집요한 도전을 계속했다.

한국항공대 자신의 강의실 현판 앞에 선 이봉구 세무사.

그런 우여곡절 끝에 약사 300명 앞에서 마침내 세법 관련 첫 대중강의를 했다. “기쁨과 흥분으로 심장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꼈다”고 당시의 감격을 되새겼다.

“다음 주에도 한국항공대 전 임직원 150명을 대상으로 ‘동기 부여’ 관련 강의를 하기로 돼 있다”는 그는 “내 삶이 드라마틱하다고 총장님이 강의를 요청하신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트라우마 극복 과정에서 내 안의 잠재 능력이 터져 나온 것 같다. 어렸을 때 고생이 없었으면 아마 세무사도 못됐을 것”이라며 “지나고 보니까 저의 약점이 오히려 강점이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대중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던 공포증 환자가 대학 강단과 한국세무사회 세무연수원의 교수로서 당당하게 강의를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그는 말한다.

이봉구 세무사는 바쁜 와중에도 댄스동아리, 승마, 합창단, 골프 등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긴다. 그에게 취미 활동은 단순히 여유를 즐기는 것만이 아니다.

“대중공포증 있을 때는 말만 잘하면 행복할 것 같았다. 공포증을 없애려고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대중을 접하는 강의를 하고 댄스, 승마 등에도 도전했다”며 “생소하고 어려웠지만 도전하니까 다 되더라. 세상 사람들에게 도전을 두려워말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저는 포기는 없다. 승마가 됐든 댄스가 됐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하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젊을 적 제대로 하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이것저것 했다하면 끝까지 하니까 주변에서 ‘팔방미인’이란 소리 들을 정도로 바뀌었다.”

“스포츠댄스를 접하고는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이런 재미를 모르고 살아왔다는 게 후회될 정도였다. 새로운 세상이었고, 모든 게 너무 좋았다”고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댄스, 승마 등의 동아리 활동 모두 기쁨과 성취감을 주고, 그런 성취감이 업무에 활력을 주는 것과 함께 봉사와 기부의 삶을 살도록 더욱 채찍질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스카이다이빙, 수상스키, 시니어모델 등도 도전 대상으로 버킷리스트에 올려놓고 있다.

“기부와 봉사의 성공적 삶은 아내의 헌신적 내조 덕분”

최근 대부도 나들이에서 가족과 함께한 이봉구 세무사. 사진 좌측부터 아내 김란희 여사, 예비며느리 오세영씨, 이봉구 세무사, 아들 이남규씨.
바닷가에서 아내 손 꼭 잡은 이봉구 세무사.
바닷가에서 아내 손 꼭 잡은 이봉구 세무사.

은둔적인 성격을 처절한 노력으로 바꿔놓은 데 이어 10여년을 기부와 봉사의 삶으로 일관하도록 한 바탕인 세무사로 성공하는 데는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가 있었다.

“주경야독하며 7번 낙방하고 8번째, 15년의 기나긴 공부로 세무사 시험에 합격해 오늘의 기부활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내가 어려움을 함께하고 큰 용기를 줬기 때문”이라며 “9급 공무원의 박봉 시절에 나 같은 고집불통한테 시집 와 고생 많이 했다”며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없는 형편에 8만원 사글세로 신혼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데 ‘멋있어 보였다’며 결혼해 준 아내에게 ‘3년 안에 세무사 합격증 보여주겠다’고 장담했는데 긴 고생길로 내몰아 지금도 미안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어려운 형편에다 두 아이 뒷바라지 때문에 아내는 10여년을 마트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3년이 아니라 다섯 배인 15년의 긴 기간을 믿고 버텨주었으니. 그 때 아내가 없었다면 폐인이 돼 지금의 이봉구는 없었을 것”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요즘 다들 세무사업이 어렵다고 그러는데 사정이 어떠냐고 그에게 질문해봤다.

“분에 넘치게 잘된다. 유튜브 강의하고 칼럼을 쓰니 지방에서도 고객이 찾아온다. 일반인뿐 아니라 세무사들도 일을 맡기는 경우가 있다”며 “거래처에 연연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고 말했다.

역경을 이겨내고 그걸 통해 더 단련이 된 자신감 충만한 삶이 모든 것의 안정을 가져왔다고 덧붙였다.

그는 4개 국어를 한다. 유창하지 않고 더듬거리는 수준이지만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소통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독학으로 깨친 것이다. “주머니에는 지금도 영어 문장이 있어요”라며 학구열을 과시했다.

그러면서 “내년 봄에 항공대 총장, CEO동문들과 일본 돗토리현으로 워크샵을 가기로 돼 있는데 ‘망신’ 당하지 않으려면 일본어 회화책과 또 씨름해야 할 것 같다”며 웃음 띤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부담의 빛이 보이지 않는 행복한 미소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잔다리로3안길 46(서교동), 국세신문사
  • 대표전화 : 02-323-4145~9
  • 팩스 : 02-323-74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예름
  • 법인명 : (주)국세신문사
  • 제호 : 日刊 NTN(일간NTN)
  • 등록번호 : 서울 아 01606
  • 등록일 : 2011-05-03
  • 발행일 : 2006-01-20
  • 발행인 : 이한구
  • 편집인 : 이한구
  • 日刊 NTN(일간NTN)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日刊 NTN(일간NTN)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tn@intn.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