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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4주년 특별대담] ‘나의 꿈, 사랑나무 재단’ 설립 우당(友堂) 이윤로 세무사
[창간 34주년 특별대담] ‘나의 꿈, 사랑나무 재단’ 설립 우당(友堂) 이윤로 세무사
  • 정창영 기자
  • 승인 2022.10.13 1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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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이웃 돕는 지속 가능 재단 마련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 삶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기적의 연속…세상에 없는 재단 출범
- 온 가족 참여한 영리법인이 재단법인 설립하고 영속적 출연 이어가
- “사랑을 느끼고, 받은 것 나눠주는 삶…그게 내 꿈이고 재단의 목적”

“인간의 탄생이 기적이듯 인생 여정도 기적의 연속이다. 오늘 아침 일어나 심호흡하며 새로운 날을 계획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 만난 주인공의 첫마디였다.
어려운 역경을 딛고 세무사로 명성을 쌓으며 시대를 풍미했던 원로 세무사의 ‘큰 꿈’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자신이 일군 모든 것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에게 사랑으로 베푸는 작업이다. 그는 사명감으로 실행하는 이 일을 ‘재물을 줄 터이니 헐벗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에게 사랑으로 베풀어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믿고 흔들림 없는 발걸음을 떼 나가고 있다. 세무사 ‘우당(友堂)’ 이윤로(81). 강남지역에 터를 잡고 ‘잘 나가는 세무사’로 살아왔다. 한국세무사고시회장과 한국세무사회 부회장, 아시아 오세아니아 세무사협회(AOTCA) 사무총장을 지냈다. 열정과 집념으로 살면서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나름대로 ‘탄탄한 기반’도 마련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일군 부와 명예의 모든 것을 바쳐 일생의 꿈이었던 ‘사랑 사업’에 막바지 열정을 쏟고 있다. 깊어가는 결실의 계절, 분당 구미동 그의 자택을 찾았다. / 편집자 주

 

- 세무사로, 수필가로, 사회사업 준비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계십니다.
“1968년 국세청과 첫 인연을 맺고 1982년 세무사 개업을 했으니 세무사 40년에 세무인으로는 55년을 함께 해 오고 있습니다.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거쳤고, 국세공무원으로, 세무사로 살아 온 제 삶은 한마디로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제 그 여정의 막바지에서 돌려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그래서 후세를 위해 기록을 남기는 그 작업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 세무사로는 워낙 정평이 나 있었지만 수필가로의 등단은 의외였습니다.
“원래 어릴 적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실제로 학창시절 ‘병든 인간’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건이 어려웠고, 현실적인 길로 들어선 것이지요. 그러나 제 가슴 속에는 ‘글쓰기’에 대한 감성이 한시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한동안 ‘국세신문’ ‘세(稅)상 살면서’ 연재칼럼에 필진으로 참여하면서 참 열심히 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인생이 기적의 연속이듯 우연한 기회에 수필을 접하게 됐고, 주변과 전문가의 적극적인 권유로 정식 등단을 했고, 즐거움으로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첫 수필집(‘나의 꿈 사랑나무’)을 내고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랑나무 재단’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데.
“제가 꿈꾸는 재단은 세계 유일무이한 형태의 재단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선교사업 등에 지원을 해 오면서 탈북민이나 미혼모, 고려인 등 우리사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을 위해 꾸준히 기부를 해 왔고 가족들에게도 기회 있을 때마다 충분히 설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충분하지 못해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재단입니까.
“우선 재단은 본래의 뜻에 맞게 항구적으로 운영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에 재단을 만들고 나서 많은 갈등을 겪는 사례를 참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재단에 대한 일부 부정적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우리 재단은 먼저 저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 3명 등 가족 5명이 공동출자로 영리법인을 만들고 법인 재산이 목표에 도달하면 그 재산의 30%를 출연해 재단법인을 설립합니다. 나머지 70%는 영리법인의 재산으로 운용하되 매년 그 경영이익의 30%는 주주에게 배당하고, 30%는 재단에 출연하며, 40%는 회사에 유보해 새로운 사업을 추진합니다. 이렇게 되면 영리법인과 재단법인이 똑같이 매년 성장해 영속적인 사업이 가능합니다. 재단의 기본재산은 유지되면서 매년 영리법인에서 추가 기부된 30%가 쌓여 해가 갈수록 재단 규모가 커지는 구조입니다.”

- 새로운 형태의 재단인데 가족 모두의 동의가 꼭 필요한 구조입니다.
“이 재단은 세대를 이어갈 장기적이고 영속적인 사업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반대하면 추진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제가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재단을 계획한 것은 그동안 재단을 둘러싼 ‘좋지 않은’ 갈등을 많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투자로 얻는 이익의 절반이 가족들의 직접적인 몫이 아닌데다 셈법이 복잡하고 영리법인과 재단법인과의 관계 등 이해하고 수긍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3남매 모두 찬성을 해서 (주)우당(友堂)이 설립됐습니다.”

- 가족이 모두 참여하게 되는데 재단 운영은 어떻게 하십니까.
“저는 이 재단에는 가족이 화목한 가운데 후손이 번창하고 신앙심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부부는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아왔고, 아이들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느끼고 받은 것을 나눠주는 삶.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꿈이고 재단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가족 외에 어떤 누구의 출연금도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가 재단을 처음 추진할 때 정부부처 고위직을 지낸 가까운 친구조차 출연금 부탁을 할까봐 선을 긋는 모습도 봤습니다.
만약 우리 재단의 취지에 동참해 출연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저는 그 분에게 이런 재단을 설립하라고 적극 권유할 것입니다. 이런 재단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와 국가, 나아가 ‘희망 있는 세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자신이 이루고 형성한 부를 이웃을 위해 그것도 향후 수익까지도 항구적으로 재단 넣어야 하는 구상은 어떻게 하게 된 것입니까.
“모두에 말씀 드렸지만 되돌아보면 제 삶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려운 시절 어머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공부를 했고, 초등학교 교사로, 국세공무원으로, 세무사로 살면서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열정과 집중이 제 삶의 바탕이듯 참 많은 도전과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사업을 같이 할 정도였어요. 물론 성공도 있었지만 실패와 좌절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주식이라는 개념조차 모른 채 우연히 접하게 된 주식에서 엄청난 성공과 그것 이상의 좌절을 경험했고, 그 때마다 벼랑 끝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면서 ‘뜻있는 길’로 가라고 명령해 주신 보이지 않는 손, 그렇게 절대적인 그 손길에 의지해 저는 살아왔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하고 어떤 난관이 있어도 실현될 것으로 믿습니다.”

- 이렇게 모든 것을 걸고 이웃을 위한 ‘나눔의 삶’을 계획하신 동기가 있습니까.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막내딸이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연세대 음악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 중이었습니다. 아내가 딸의 통장에서 매월 적지 않은 금액이 빠져 나가는 것을 알았고, 연유를 알아보니 기도 중에 해외선교 사업에 헌금하라는 응답을 받고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필리핀 선교사님께 제 딸이 첫 후원자였고 선교사님은 많은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때 제가 딸에게 대신 헌금을 할 테니 계좌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선교 후원활동의 시작이 됐고 선교나 구제, 이웃을 위한 재단법인 설립에 대한 꿈이 시작됐습니다. 실제로 저는 사범학교 시절 적성검사에서도 고아원, 양로원 경영자가 가장 적합한 적성으로 나왔습니다.
딸의 후원을 대신 하면서 기쁨과 은혜를 알게 됐고 신앙심도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계속 열심히 하기 위해서는 ‘돈도 더 벌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필리핀 일로일로 사랑의 교회. 제가 처음 건축헌금을 드리며 기적을 체험했고 가득 은혜를 받은 곳입니다.”

- 앞으로 계획과 하고 싶은 말씀은.
“재단은 제 수필집 제목 그대로 ‘나의 꿈, 사랑나무’입니다. 기왕 마음먹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 일은 제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 우리 가족 모두가 하나가 돼 추진해야 하는 만큼 아내, 3남매, 그리고 손자·손녀 모두 함께해야 합니다. 꼭 그렇게 돼 이 땅에 지속 가능한 나눔 재단을 뿌리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강남에서 이름을 날린 세무사이자 수필가, 증권투자 전문가인 우당 이윤로는 1941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곧바로 교사로 임용돼 8년 가까이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어 ‘뜻한 바’ 있어 국세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1968년 28살 나이에 세무공무원이 됐고 약 15년 동안 국세청에서 근무한 뒤 개업 세무사로 변신했다. 이후 성공적인 개업세무사의 길을 걸었고, 세무사 제도 발전에도 관심이 많아 회직에 꾸준히 참여했으며 한국세무사고시회장과 한국세무사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열정적이고 맡은 일에 대한 집중력이 탁월했던 그는 세무사고시회장을 맡으면서 헌신적으로 노력해 오늘의 ‘전국단위 고시회’의 확실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고시회장 회비를 5배 인상해 솔선해 납부했으며 전체 회원에게 1만원 회비 납부 운동을 벌이며 회원 참여를 유도한 뒤 고시회 기반을 다져 놓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어 한국세무사회 부회장에 당선돼 당시 구종태 회장과 함께 세무사회 중흥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오늘날 세무사회를 대표하는 ‘전산세무회계 자격시험’ 도입 등 세무사회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세무사회 부회장 시절 아시아 오세아니아 세무사협회(AOTCA) 사무총장을 맡았고, 2002년 일본 교토 총회에서 1000여명의 각국 세무사가 참석한 가운데 영어로 매끄럽게 사회를 진행한 것은 세무사업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이 행사가 국제행사여서 회장과 달리 사회는 통역 없이 영어로 사회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담당직원의 도움을 받아 가며 밤새 영문으로 원고를 쓰고 이를 모두 외운 결과 실수 없이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국세청에 근무할 당시 세무조사를 나갔다가 ‘권유 반 사정 반’으로 접하게 된 주식투자는 그의 인생과 줄곧 함께 했으며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롤러코스터를 타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해 ‘주식의 주’자고 모르던 그를 오늘날 증권투자 전문가로 거듭나게 했다. 그는 주식투자 과정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도 겪었으며 많은 내공을 쌓고 삶의 근원과 접하는 기회를 가졌다고 전한다.
특히 최선을 다하는 노력으로 일관했지만 절대적인 벽에 막혀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실감했고, 외경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습관은 삶의 한 부분이 됐다.   

학창시절 글재주가 뛰어나고 감성이 풍부해 문학청년을 꿈 꿨던 그는 회갑을 맞아 모처럼 여유를 갖고 음반(트롯가요)을 낼까? 경치 좋은 강변에 오두막집을 짓고 글을 쓸까?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재단을 만들까? 새로운 60년을 향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난해 우연이 주변으로부터 글쓰기를 권유받고 ‘수필방’에 들렀다가 전문가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문예지 ‘현대수필’을 통해 정식 수필가 등단으로 이어졌다. 이후 마치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밤을 새며 이어진 글쓰기 작업은 8개월여 만에 무려 60여 편을 쏟아내 지난 6월 마침내 첫 수필집 ‘나의 꿈, 사랑나무’를 출간했다. 그의 글쓰기 본능을 자극한 이 ‘사건’을 그는 기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늘 가슴에 간직했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업은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부분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가족 모두가 참여하는 ‘사랑나무 재단’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그에게는 이 ‘사건’도 기적이다.
시련도 있다. 건강에 자신하면서 방심했고, 지난해 연말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건강보험 검진을 받았는데 당 수치가 높다는 결과와 함께 ‘병원 가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혈액검사 결과 암 최고 수치를 받아 들고 깜짝 놀랐다. 올해 상급병원의 최종 검진 결과 췌장암 판정을 받고 고통스런 치료를 받으면서도 수필집을 내고, 사랑나무 재단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고 있다.

그가 세무사로, 수필가로, 증권투자가로 살아오는 동안 그의 곁에는 부인 정경택 씨와 아들 상준(대한상의), 혁준(의사), 딸 영림씨 등 소중한 가족이 늘 큰 힘이 됐다. 여기에 며느리 이경은, 조은정(의사), 사위 나상덕(외교관)씨 역시 그의 꿈, 사랑나무 재단의 든든한 동반자라고 그는 말하며 오늘도 쉬지 않고 열정과 집념의 힘찬 발걸음을 떼고 있다.

 

이윤로 세무사는 수필가 등단과 함께 지난 6월 첫 수필집 ‘나의 꿈, 사랑나무’를 출간했다.(선우미디어. 238쪽) 
청년시절 소설가를 꿈 꿨던 저자는 교사와 세무인으로 살아오면서 접어 뒀던 꿈을 이번 수필집에 혼신을 다해 자전적 에세이 형식으로 기록했다.

이 책은 특히 어린 시절 고향인 전남 영암을 떠나 광주로 유학하면서부터 가슴에 새겨진 정서를 시작으로 험난한 인생의 여정을 헤쳐 나오면서 작가가 느낀 인생의 달고, 쓰고, 맵고, 신 맛의 기억을 수필로 담담하게 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기적의 연속’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진한 물음과 함께 그동안 하고자 했던 일을 당당하게 공개하며 새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유와 심정을 작품을 통해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모두 여섯 묶음으로 구성됐는데 제1장 뜨거운 ‘아이스 케키’에 7편, 제2장 ‘멀리 높이 날아라’에 12편, 제3장 ‘나의 꿈, 사랑나무’에 11편, 제4장 ‘열정과 집중’에 12편, 제5장 ‘잠깐만’에 9편, 제6장 ‘신선한 충격’에 8편 등 모두 59편의 작품을 담고 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부터 가족에 얽힌 이야기, 신앙을 통한 기적의 삶, 세상 살아 낸 일화, 가슴에 간직해 온 정서와 꿈, 이뤄야 할 남은 일을 침착하고 진솔한 필력으로 다가서고 있다.

작가는 “‘나의 꿈, 사랑나무’는 신께서 인도하신 나의 여정 대한 자전적 수필이다. 그 정점에 ‘사랑나무 재단’이 있고, 보이지 않는 손의 돌보심으로 재단이 설립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이 책은 천년 동안 이어갈 사랑나무 재단에 대한 나의 후손들의 미래를 상상하며 그 꿈을 실현시킬 비전과 내용을 담았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세무사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국세신문 인기 연재칼럼 ‘세상 살면서’에 참여했던 글을 큰 며느리 이경은 씨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췌해 이 책 출간에 도움 준 것을 비롯해 가족 모두가 적극적인 성원을 보내 이 책을 세상에 내 놓을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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