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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稅想칼럼] 대국민 용어 감수성을 키우자
[稅想칼럼] 대국민 용어 감수성을 키우자
  • 김진웅 논설위원
  • 승인 2019.02.28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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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웅 (본지 논설위원)

중독성 하면 도박이나 마약을 떠올린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 마약보다 더 간단히 중독시키는 것들이 즐비하다. 강남스타일의 단순반복적인 리듬은 전세계를 중독시켰다. 그간 거의 33억 회의 조회수를 올리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핑크퐁이 영어버전으로 올린 ‘아기 상어 뚜루루 뚜루’도 유튜브 히트수가 22억에 이르면서 빌보드 핫 100 싱글차트에 동요가 버젓이 32위에 차트인했다.

두 노래의 공통점은 캐치(catchy) 리듬과 반복의 재미에 있다. 반복은 마성을 낳고, 마성은 중독을 부른다. 가짜 뉴스와 무책임한 정치 발언도 무한반복의 마성을 발휘한다. 악의적인 댓글들이 날개 달린 듯 삽시간에 퍼진다. 이기심과 익명성의 어두움 속에 숨어 애먼 이들을 곤경에 몰아넣는다.

우리 속담에는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입에 자주 올리다 보면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지만 거꾸로 그는 그 말에 지배된다는 거다. 그래서 예전에는 국민교육헌장을 국민에게 암송시켰다. 종교 역시 경전이나 찬송 구절을 반복(chanting) 시킨다. 챈팅에 몰입하면 말이 마성을 발현하면서 방언이 나오고 접신도 한다.

음악이나 언어는 인간 스스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반대가 된다. 언어가 그들을 지배하기도 한다. 말이 행동을 불러오고 결국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군대에서는 깍두기 언어라는 ‘다나까’를 사병들에게 강요한다. 작위적인 이 언어는 사실상 군기잡기용 언어체라는 지적을 받는다. 정작 직업군인인 장교들은 그런 언어를 쓰지 않는다.

언어를 통해 인간의 사고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잘 보여준다. 주인공 윈스턴이 하는 일은 어휘 축소 작업이다. 지배자들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어휘로만 의사소통하기를 원한다. 통치자인 ‘빅 브라더’는 언어 사멸 작업을 통해 사고를 획일화하고, 반역을 근원부터 차단하려 든다.

가령 ‘좋다’의 반대말인 ‘나쁘다’를 없애고, ‘안 좋다’만 남긴다. 탁월하다는 단어도 사멸한다. ‘아주 좋다’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용 어휘가 줄어들며 인간의 사고도 축소된다. 사고의 폭을 줄이면 애당초 사상죄의 발생을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고 믿는다.

네이밍(naming)은 말이 포승이다. 미국에서 반공 광풍이 불었다. 매카시는 정적을 공산주의자라는 네이밍을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고 그들은 속절없이 제거되었다. 어휘는 포승이다.

한반도에서도 빨갱이라는 말은 대표적인 네이밍이 되었다. 한때 빨갱이로 낙인이 찍히면 처형되고 그 가족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보다 더한 주홍글씨는 없었다. 지금도 빨갱이라는 네이밍은 치명적이다. 정치적으로 공격할 때 빨갱이라는 어휘보다 더 효과적인 건 없다.

빨갱이의 어원은 파티잔(partisan)을 빨치산으로 발음하면서 빨갱이로 진화했다고도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일경(日警)에 그 뿌리를 두었다.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사상전향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체포자 명부의 독립운동가 이름에 빨간 점을 찍어 놓고 ‘아카’라고 불렀다. ‘아카(あか)’는 빨갛다는 의미이며 빨갱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매도한 최초의 단어였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해방 후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공산당 치하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을 공산당 동조자라며 빨갱이라 불렀다. 친일 군경이었던 김종원과 노덕술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심하게 고문했고,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인 김원봉 투사를 체포하여 ‘빨갱이 두목’이라고 모욕하며 뺨을 때렸다. 빨갱이라는 말은 독립투사들에 대한 예의상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할 듯하다.

노동(labor)이라는 어휘 역시 우리 사회에서는 차별 받는 어휘의 하나다. 영국이나 OECD 회원국들의 많은 집권당은 노동당이다. 노동은 자본주의의 근간이며 아름다운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노동이 주는 어감은 비천하거나 공포스럽다. 노동자의 어감이 그러하고, 노동당하면 북한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연원상 근로라는 단어는 노동보다 정치적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제노역 등을 미화하는 말로 이용되었다. ‘전시근로동원법안’ 등에서 보듯이 대가 없는 노동에 근로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1963년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개명한다. 그러나 ‘노동계’는 ‘근로계’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부정적인 어감을 띤 ‘노동계’로 불리운다. 노동이 감정이 있다면 꽤나 억울해 할 듯하다.

어휘를 둘러보면 부적절한 용례는 얼마든지 많다. 우리의 대통령제가 제왕적이라는 견해에는 여야 정치인들이 드물게도 이견이 없다. 제왕적이면 헌법을 고치면 된다. 그러나 개헌은 요원하다. 그런데 제왕적이라는 말도 위압적이지만 대통령(大統領)이라는 어의(語義) 역시 중세의 독재자나 소설 속 빅 브라더를 연상시킨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국민이 뽑은 일꾼이라는 느낌과는 사뭇 멀다.

대통령의 대(大)는 크다는 거고, 통(統)은 다스린다는 거고, 령(領)은 수령이라는 뜻이다. 글자 그대로 우리를 다스리는 큰 수령이다. 이게 민주주의적 시의에 맞는 공직명일까? 그러면 미국에서는 무어라 부르는가? President 란다. preside 하는 사람, 즉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이다. 각료들을 모아서 회의를 하는 사람이지 자신을 뽑아 준 국민을 다스리는 수령은 아니다. 장관은 secretary다. president의 특정 부처 책임 어감을 가진다. 우리처럼 장관이라 하여 국민 앞에서 어른 장(長)자를 함부로 쓰지는 않는다.

국내에도 외국법인이나 외국인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한국에서 불편하게 느끼는 단어가 있다. <조사>라는 어휘다. 한국 정부가 하는 일들에 왠 조사가 그리도 많은지 궁금해 한다. 한국 국민과 기업들은 조사 받을 일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 의아해한다. 그리 보니 확인출장으로 족할 일도 ‘조사’라는 행정용어를 쓴다. 점검, 확인, 심사 등의 한 단계 완화된 용어도 많으련만 국민과 납세자를 상대로 늘 ‘조사’를 하고 싶어한다. 권력이 있음을 과시하고 싶은 것일까.

한국인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지도 받고 조사 받는다는 언어 프레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조사라는 어휘는 역사적 챈팅(chanting)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도시 거부감이 없다. 과거에 혹여 부정과 불법이 많았을지 몰라도 지금의 한국은 다르다. 국제사회에 우뚝 서있다. 지금의 국내외 기업들은 탈세를 일삼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은 3~5년 마다 ‘정기적’으로 ‘세무조사’를 한다니 외국 납세자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조사를 어떻게 정기적으로 할 수 있는가 되묻는다. 선진국에서는 한국처럼 길을 막아놓고 일률적으로 음주측정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모든 차량을 음주차량으로 전제할 수 있는가 국민이 묻기 때문이다. 가택수색에 영장이 전제되듯이 음주단속도 특별한 경우에 한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하니 정기적으로 일률적인 세무조사를 하는 게 내국인들과 달리 외국 납세자들에게는 남용(abuse)으로 비칠 법도 하다. 조사라는 건 구체적인 혐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기에 혐의가 정기적으로 자동 발생하지 않고서는 정기조사라는 말은 어법모순이다.

납세자들이 전국의 어느 세무관서에 가든 만나는 이들의 직명은 모두 조사관이다. 납세자들이 세무관서에 가는 것이 오로지 조사만 받으러 가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민원실 직원조차 명함은 조사관이고, 근로장려금을 처리해주는 이도 조사관이다. 모두 고마운 서비스업무인데 조사라는 말을 그리도 쓰고 싶은가? 비록 조사업무라 할지라도 용어를 순화하여 현장확인이나 점검 출장, 심사 등으로 바꾸는 지략(?)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조세심판원이라는 말도 외국인에게 직역하여 주니 심판원이 신들이 일하는 곳이냐고 되물었다. 심판은 신이 하는 일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에 웃고 말았다. 심사원이나 심리원 정도로 어휘를 완화해야 할 것 같다. 사석에서 조세심판원의 현직이 납세자 보호원이라고 하면 납세자 친화적이지 않냐고 하니까 오히려 전직들이 펄쩍 뛰었다. 그리하면 심판원의 위상을 낮춘다는 거다.

우리는 용어의 부적절함과 과도함에 익숙해져 있다. 특히 관청이 하는 일에서 그러하다. 관청은 아직도 관아인 셈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의 리더 그룹이다. 언제까지 과도한 용어를 헌법과 세법에 담고 있을 것인가? 납세자들이 찾는 세무서에는 왜 조사관들만 있는가? 국세청은 서비스 기관이 되겠다고 National Tax Service로 개명까지 하였으니 걸맞는 직함을 개발하면 안되는가?

징세기관만의 일이 아니다. 모든 행정부처는 용어의 순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순화하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우리사회는 목하 미투(Me too)로 사회적 성장통을 겪고 있다. 여성계가 환영한 대법원의 주목할만한 용어에는 ‘젠더 감수성’이라는 게 있다. 제발 남자들이 젠더에 대한 감수성을 배우라는 거다. 감수성이 없으니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앞으로 행정부처는 ‘대국민 용어 감수성’을 가졌으면 싶다. 21세기 세계 10위의 국가에서 국민을 ‘다스리는’ 큰 수령이 있고, 정부가 ‘정기적으로’ 국민을 조사하고, 세금을 제대로 내는지 ‘심판하는’ 나라가 있다고 외국인들이 지적할 때 뭐라 답하겠나. 한국은 헌법 조문에서만 국민이 주인이고 정작은 관청이 주인인 국가로 비칠 수 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배려와 감수성의 문제다.

 

 


김진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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