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연동제, 속내는 누진세 폐지(?)”
[기획] ‘소득세 물가연동제’ 찬반양론 긴급점검
박근혜, 대선공약채택 뒤 본격 여론검증
진보진영 “단일세율전환땐 고소득자 천국”
2007-06-05 jcy
특히 유리지갑으로 불리는 근로소득자들의 경우, 큰 폭의 물가인상에 따른 실질소득 감소를 감안하면 세율인하에 따른 세 부담 감소혜택은 거의 누릴 수 없으므로, 물가에 연동해 소득세부담 경감 방안을 마련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른 바 ‘소득세 물가연동제’다. 조세전문가의 정책제안중 하나로 여겨져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그다지 받지 못했던 이 제도는 최근 유력한 대선주자인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공약으로 채택되면서 본격적인 검증을 기다리고 있다. ‘소득세 물가연동제’를 둘러싼 찬반양론을 정리해봤다. <편집자 주>
국회 예산정책처는 지난 5월 초순 “세율인하에도 조세부담이 좀처럼 줄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득세물가연동제'의 도입을 검토하는 한편 각종 공제제도를 대폭 정비할 필요가 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소득세 물가연동제'란 물가가 오른 만큼 소득세 부담을 줄여주는 제도로,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다.
전승훈 국회 예산정책처 세입세제분석팀 경제분석관은 지난달 8일 펴낸 ‘한국의 유효소득세 함수 추정'이란 제목의 연구보고서에서 지난 1998∼2005년 이뤄진 소득세법 개정의 효과를 분석한 결과 “각종 세율인하 및 공제제도 확대에도 불구하고 가구주 및 가구의 소득세 부담은 크게 완화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이는 물가상승에 따른 명목소득 증가가 소득세 부담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전 분석관은 이어 “세수효과 분석결과, 탄력성이 추세적으로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평균한계세율이 추세적으로 증가했음에도 세수탄력성이 추세적으로 감소했다는 것은 가구주 및 가구가 직면하는 세율은 높아졌지만 각종 공제제도에 따른 세원은 되레 축소됐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1998∼2005년 이뤄진 소득세법 개정이 ‘낮은 세율, 넓은 세원'이라는 중장기 조세개혁 방향에 다소 역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덧붙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물가상승률이 0.8% 수준이던 1999년에는 근로소득공제제도 인하로 소득수준별 소득세 부담이 완화됐다. 하지만 물가상승률이 2.3%, 4.1%를 각각 기록했던 2000년과 2001년에는 세법 개정이 없거나 소득공제가 확대됐음에도 소득세 부담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정 한계세율 인하와 소득(세액)공제 확대에도 불구, 소득세부담 감소효과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다는 분석.
진짜 속셈은 누진세 폐지?
과세표준부터 뜯어 고쳐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근로소득세 과세표준이 10년 넘게 고정돼 있어, 소득증가에 따른 세 부담증가가 과도하다는 비판이 주장의 근거다. 전 분석관은 “평범한 중산층 월급생활자에게만 고통을 강요해온 근로소득세 과세표준을 물가상승률에 연동하자"고 제안했다. 이른 바 ‘소득세 물가연동제'다.
세제 당국인 재정경제부는 이에 대해 “과표구간을 단순히 상향조정하면 고소득자가 많은 자영업자가 근로소득자에 견줘 더 유리하다"고 이런 제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다.
전 분석관은 그러나 “문제는 자영업자 소득파악이 이뤄지지 않아 근로소득자와 자영업자의 소득세 부담에 차이가 발생해 자영업자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라며 “소득파악이 정확히 이뤄지고 정확한 과세가 이뤄진다면 소득수준이 높은 자영업자가 더 많은 혜택을 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반박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자영업자들의 낮은 소득 포착률과 형평을 맞추기 위해 근로소득에 대한 높은 공제를 허용하고 있다"면서 “소득세의 공제제도 정비를 위해서는 자영업자에 대한 소득 포착률을 높이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자영업자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특성을 감안, 이들의 정확한 소득신고를 유도하고 이들에 대한 세무조사의 강도를 높이는 한편 탈세에 대한 가산세율을 대폭 강화하면 된다는 지적.
이 문제는 그러나 현행 한국이 채택하고 있는 소득세 누진세율 논란과 반드시 만나게 돼 있다. ‘소득세 물가연동제'는 현행 소득세 체계에서 누진제를 없애고 단일세제만 채택해도 저절로 없어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
그 결과 고소득자에게 유리한 방향(누진세율체계 폐지, 단일세율 채택)으로 정책대안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분배형평을 주장하는 진보개혁세력의 폭넓은 저항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한 시민단체의 운영위원은 “(‘소득세 물가연동제'가)중산층 이하의 근로소득자들을 주된 정책 타깃으로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부자들의 누진세를 완화 또는 폐지하려는 음모(?)가 숨어있는 주장"이라며 이른 바 ‘음모론'을 제기했다.
보수진영, 누진세율 폐지 본격 촉구
진보개혁 진영의 지적이 막연한 추측에 근거한 ‘음모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반대 진영에서 소득세 단일세율 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나섰기 때문.
김한응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지난 3월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세금을 줄이는 길 중에서는 소득의 고저와 개인-기업을 가리지 않고 똑 같은 세율을 적용하는 (누진세제가 없는) 단일세제도(flat tax system)를 채택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주장했다. 단일세제도를 채택한 홍콩, 동구 구공산권제국들이 모두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다는 게 근거다.
김 대표는 또 “우리나라의 단일세율은 15%~20%로 하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생각된다"며 “물론 이런 세율인하가 정부지출의 삭감과 결합된다면 국민의 부담은 더욱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민연금 민영화를 통해 개인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도록 하고 건강보험 등을 효율화하는 방법도 어느 정도 국민 부담을 줄이는 방법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박 전 대표를 지지하는 한나라당의 한 정치인도 “누진제를 그대로 놓아두고 소득세 물가연동제를 실시하면 매년 인플레가 몇%인지에 대한 정당간의 합의와 그에 대한 행정부의 동의 획득 등 기술적 문제로 그 결정까지에는 거쳐야 할 과정이 너무 많다"며 “대신 단일세율로 소득세를 부과하는 체제를 구축하면 그런 복잡한 절차 없이 매년 자동적으로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단일세율 세제를 채택하면 소득세의 물가연동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뿐 아니라, 소득 중에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세금을 부담시켜 성장도 촉진시키는 장점까지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단일세제는 이밖에도 납세자의 납세비용과 과세당국의 징세비용도 획기적으로 줄여줄 것" “누진세율 체계 아래에 수반됐던 각종 감면 특혜제도를 폐지, 조세부과에 따른 시장왜곡도 없어지고 시장기능을 효율화해 주는 장점도 있다" 등 ‘예찬론' 수준의 옹호논리를 가감없이 펼쳤다.
소득세 물가연동 왜 나왔나?
누진세제, 소득구간 자동상승…세 부담 늘어
인플레에 따라 매년 물가가 오르게 돼 있다. 근로소득자들의 실질소득을 보전해주려면 명목소득을 인플레율만큼 올려줘야 한다.
그런데 소득세는 명목소득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한다. 명목소득이 물가상승에 따라 자동으로 올라가도, 소득세의 누진(累進)성 때문에 세율구간이 한 단계 올라간다.
과거보다 높은 세율을 적용받게 돼 전반적인 세 부담이 높아지는 것. 미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표준소득구간의 자동 상승(bracket creep)'이라고 부른다.
‘소득세 물가연동제'란 소득세 과세표준 구간, 세율, 각종 공제제도 등을 물가에 연동시켜 자동적으로 조정하는 제도. 미국, 캐나다, 아일랜드,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매년 소비자물가지수를 사용해 만든 생계비지수를 기준으로 과표 구간의 기준금액 및 각종 공제의 구간이나 공제기준금액도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변화시키고 있다.
물가상승률을 적용한 명목적인 구간이나 금액은 매년 세액을 계산하기 전에 정부에서 발표하고 있다.
캐나다의 경우도 미국과 같이 소득세를 물가에 완전 연동하는 방식을 도입해 시행하고 있으며, 아일랜드와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도 일부 물가연동제를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종명 기자 lun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