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稅政칼럼]사발(沙鉢)과 쨔왕(茶碗)
김진웅 본지 논설위원
2007-09-15 33
▲ 김진웅 본지 논설위원 | ||
실상 한국인과 일본인은 서로 외모는 비슷해도 다른 점이 많은 것 같다. 식사만 해도 그렇다. 밥 그릇을 들고 먹으면 아마도 우리는 ‘거지나 밥 그릇을 들고 다니며 먹는 거’라고 핀잔을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밥을 상에 놓고 먹으면 개나 바닥에 놓인 밥 그릇에 고개 숙이고 먹는 거라며 들고 먹도록 가르친다. 이런 문화적 차이를 모르다 보니 시청자들은 그만 한국인들을 왜 개로 보느냐고 분노하는 사태에 이른 모양이다.
실제로 일본인의 밥 그릇(쨔왕, 茶碗)은 들고 먹기 적당하게 작다. 쨔왕에는 자연 정교한 문양을 그릇 안 쪽에 새겨서 눈으로 감상하면서 먹는다. 국도 들고 마시기에 젓가락(와리바시, 割箸)만 놓는다. 반면에 한국의 밥 사발(沙鉢)은 놓고 먹기에 알맞다.
누구나 보도록 문양도 그릇 바깥에 새기고 있다. 일본인의 집에 초대 받아 간 한국 손님과 일본 주인 간에 밥상을 앞에 놓고 무언의 韓日간 대치 상태가 벌어졌다. 한국인은 주인이 먼저 수저를 들어야 했고, 일본인은 손님이 먼저 수저를 들어야 예의였기 때문이다. 모두 문화의 차이다. 우리 주변에는 差異가 늘 존재한다. 차이는 곧잘 오해를 낳는다. 오해는 다시 갈등을 부르곤 한다.
30여 년 전에 마산 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한 일본계 기업에 출장을 갔다가 당시로서는 생소한 장면을 보았다. 공장 식당에 젊은 여공들이 줄지어 서서 점심 배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머리가 하얀 초로의 신사가 끼어 서있기에 누군가 알아 보니 일본인 공장장이었다.
당시에 국내기업 임원들이라면 칸막이한 간부식당에 앉아서 점잖게 먹던 시절이었기에 예사로 보이질 않았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요즈음 미국계 기업에 사장을 만나러 갔더니 사장이 여직원 책상 부스에 팔을 걸치고 동료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직원은 사장이 왔어도 자기 컴퓨터를 응시한 채 일을 계속하였다. 사장이 사장실을 놔두고 여사원을 찾아가서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사장이 왔는데 젊은 여직원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낯설었다.
그 사장은 비서가 휴가를 가면 음식점 예약이나 비서가 하는 일들을 모두 자기가 직접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장은 한국인이었다. 세상은 많이 바뀌며 많이 다르기도 하다.
차이는 오해나 갈등을 야기한다. 그러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순간 그 것은 다양성이라는 자산으로 변한다. 사고의 다양성, 생활방식의 다양성, 문화의 다양성이 넘치는 사회는 다채롭고 역동적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 다른 복장을 선호하는 사람, 나와 다른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분개하지 말자.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은 다양성이 주는 선물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텔레반식 사회이다. 인류의 문화재를 이교도의 잔재라고 폭파시키는 야만과 다를 게 없다.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양하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행정당국도 안팎의 다른 시각에 대하여 더 개방적이고 수용적이어야 한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행정당국과 바깥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간극도 점점 커질 것이며 행정실패로 가는 첩경이 될 수 있다. 행정은 대표적인 공공서비스이다. 서비스는 가능한 한 다양한 옵션을 제공할 때 경쟁력이 있다. 서로의 차이에 대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은 바로 옵션 강화이자 서비스 제고를 뜻한다.
예를 들면 불복 청구인은 자유로운 대면설명 기회를 선호한다. 불복 담당자는 처리 기한을 단축하기를 원한다. 대면설명을 모두 받으면서 빨리 처리할 수는 없다. 상호대립적이다. 이런 경우에는 고속 심리제와 늦더라도 세심한 설명기회를 부여하는 완행 심리제 두 옵션 중 납세자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납세자가 선택한 이상 감사에서도 처리기한 도과를 가지고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면 카타르시스가 된다. 기각이 되더라도 할 말은 다했으니 시원하다. 만족도가 향상된다.
이는 ‘당나귀 귀’ 효과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 밖에 내지 못하니 죽을 지경에 이르는 우화의 교훈이다. 분명한 것은 선진국일수록 매사에 더 많은 옵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