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2년 만에 사내유보금에 과세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의 발단은 새로 출범한 ‘최경환 경제팀’이 기업 소득을 가계 소득으로 유입하는 방안을 하반기 경제운용방안에 포함시키면서 여기에 사내유보금을 활용하는 방안, 그 중에서도 과세를 검토중이라는 소식에서 비롯됐다. 단기적으로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증시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현재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는 시장의 반응과 주요 논점들을 정리해 본다. /편집자주
◇기업의 사내유보금 실체와 과세 배경
사내유보금이란 일정기간 기업이 벌어들인 이윤에서 세금, 배당금, 상여 등 회사 밖으로 유출된 금액을 제외하고 사내에 쌓아두는 자금을 의미한다. 이미 법인세를 납부한 기업 입장에서는 ‘이중과세’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내수부양이라는 명분과 세제 혜택을 앞세워 관철시킨다는 입장이다. 도통 살아나지 못하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기업에 쌓여있는 여윳돈을 강제로라도 풀어내 경제 활성화를 추진하겠다는 뜻이다.
국내 10대 그룹 81개 상장사(금융사 제외)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 1분기 말 사내유보금은 515조9천억원으로, 5년 전인 2009년의 271조원에 비해 90.3%나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에 따라 유보율도 986.9%에서 1733.9%로 747%포인트나 높아졌다. 특히 삼성전자 유보금이 70조9천억원에서 158조4천억원으로 87조5천억원(123.4%) 늘며 그룹 유보금 증가액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같은 기간 현대자동차그룹은 41조2천억원에서 113조9천억원으로 72조6천억원 늘어나며(176%) 2위를 기록했고 SK(24조1천억원·70%)와 LG(17조원·52%)가 뒤를 이었다.
이들 4대 그룹이 10대 그룹 사내유보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8.3%에 달했고, 이중 35.4%가 삼성그룹 몫이었다.
1990년 비상장사를 중심으로 도입된 국내 법인들의 사내유보금은 2001년까지 5% 수준에 불과했으나, 사내유보에 대한 과세제도가 폐지된 2002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3배 이상 유보율이 증가한 이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이처럼 기업들이 번 돈을 투자로 연결시키기 보다 사내에 유보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일각에서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부과해 투자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지난해 당시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이인영 의원은 무분별한 사내유보를 방지하고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대기업의 적정수준의 사내유보금을 초과한 금액에 대해 법인세를 부과하는 법인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인영 의원은 “현재 한국경제는 기업 이익이 늘어도 고용과 투자로 연결되지 않고 사내유보만 쌓이면서 내수와 수출, 가계와 기업 간의 불균형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재벌그룹이 과다한 사내유보금을 생산적으로 사용해 경제성장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제도를 통해 이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올해 초 현오석 전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과세를 하면 배당액만 올리는 결과를 낳으므로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는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며 “투자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고 오히려 투자가 위축되는 역효과를 가져온다”고 반대 입장을 견지해 왔다.
◇최경환 경제팀, 새 술은 새 부대에?
기업의 사내유보금에 과세방안이 구체적인 화두로 떠오른 것은 지난 9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최 부총리가 “내수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수출 대기업의 과도한 사내유보금을 가계부문으로 이전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면서부터다.
최 부총리는 “가계 부담을 완화하는 전통적인 방법과 함께 가계소득을 직접적으로 확대하는 정책을 강구하겠다”며 “기업들이 유보금으로 근로소득과 배당을 늘리도록 유도하는 정책 방안을 마련하는 중”이라고 강조한 것. 이어서 기획재정부는 지난 14일 “기업소득이 가계로 흘러갈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 가능한 방안들을 다각적으로 검토 중”이라면서 “대기업이 과도하게 쌓아둔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과 함께 배당을 늘리는 기업에 대해서는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방안을 함께 강구중”이라고 밝혔다.
이는 내수 진작을 최우선 목표로 밝힌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이 내놓을 수 있는 안 중 상대적으로 현실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최근 불거진 배당확대 이슈와 맞물려 주식시장에도 ‘훈풍’이 불 전망이다.
하지만 논란이 커지자 기재부는 “가계 가처분소득을 증대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논의 중이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다”고 한발 물러섰다.
◇엇갈리는 시장의 반응
정부가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는 공식적 입장을 피력했지만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당장 기업 투자는 물론 장기적으로 재무건전성과 관계된 일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우선 단기적인 효과는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금융투자업계는 정부안을 일제히 환영하고 있다. 주주이익환원 차원에서 강제적으로라도 배당이 늘어날 경우 박스권에 머물고 있는 주식시장에 상승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지지부진한 국내증시의 분위기 전환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승현 대신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경우 배당성향을 높이면 주가가 200만원을 넘어갈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면서 “전반적인 마켓밸류가 올라가게 되는만큼 증시에는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김정호 HMC투자증권 연구원은 “우리나라와 산업구조가 비슷한 대만 증시는 유보금에 과세, 배당 정책을 활발하게 해 투자 매력도가 높다”면서 “단기자금이 좌지우지하면서 박스권을 맴돌고 있는 우리나라 증시에 사내유보금 과세는 분명히 득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현철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우리나라 기업은 유보금이 많은데도 배당은 안 하는 문화”라며 “한국의 배당수익률은 1%대에 불과해 주변국인 대만 3.0%, 인도 1.5%, 인도네시아 2.6%, 중국 3.5% 등에 비해 크게 낮고 심지어 저성장이 고질화된 일본 1.9%보다도 못하다”고 말했다. 강 연구원은 또 “초과유보금에 대한 과세안이 폐지되기 전인 2000년까지는 배당수익률이 2%에 달했지만 법안 폐지 이후 1%대로 급감해 기업의 적극적인 주주환원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 “결국 기업 재무상태 악화시키는 것”
정부가 추진 중인 기업의 과도한 사내 유보금에 대한 과세안에 대해 경제계가 “기업 부담이 가중돼 경제가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과도한 사내 유보금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이 시행되면 기업들의 경영 환경이 힘들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가계 소득증대를 통해 소비를 늘려 경제활성화를 이끌겠다는 정부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지원 키움증권 연구원은 “시장경제에서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을 하게 되는 것인데 이럴 경우 시장 가격이 왜곡될 수 있다”면서 “정부 정책은 언제나 ‘양날의 검’인만큼 긍정적인 효과와 부작용을 모두 판단해 더 이익이 큰 쪽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일 전경련 금융조세팀장도 “사내 유보금을 기업들이 금고에 쌓아둔 현금이라고 보는 잘못된 인식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며 “사내 유보금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면 과세 방안은 잘못된 해결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전삼현 숭실대(법학과) 교수는 “사내유보금은 최고경영자(CEO)가 일방적으로 통장을 만들어 보관하는 것이 아닌 상법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유보해야 하는 것”이라며 “사내유보금이 많은 대기업 대부분의 발행주식이 외국인 소유 지분 40%대를 초과한다는 점에서 내수 진작 효과보다는 국부의 해외유출 정도가 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은 “사내유보금이라는 용어 자체가 불필요하게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자금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사내유보금 대신 ‘미배당금’ 또는 ‘투자 및 사내유보금’으로 바꿔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경상 대한상의 경제연구실장은 “기업이 사내 유보금을 배당이나 근로자의 임금 등 가계로 돌리면 당장의 소비 촉진효과는 있겠지만 기업에는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경제 활성화를 위해선 기업들이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며 만일 기업 투자가 위축되면 기업 경쟁력이 떨어져 경제에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사례와 향후 전망은?
미국의 경우 기업이 사업 확장이나 운영 등 사업과 관련한 합리적인 수요 이상으로 이익을 축적하면 과세하는 AET(Accumulated Earning Tax)가 있지만, 이는 비상장사의 제한된 소수의 주주들이 배당소득세를 회피하려는 시도를 막는데 목적이 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11년 내놓은 ‘법인의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방안연구’에 따르면 소수의 주주들이 과도한 이익을 배당하지 않고 사내에 유보해 배당에 따른 소득세를 이연하려는 것을 막자는 것이 AET의 목적이지 기업의 미래 투자를 위해 유보해 놓은 것을 경제활성화를 위해 풀자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세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은 △상여금 지급 △배당확대 △추가 투자 등 세 가지 중 적어도 하나는 해야 할 상황인데 모두 내수경기를 띄우는데 중요한 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범호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보통 현금성 자산이 늘어나는 이유는 수익성이 좋아지거나 외부자금 유입, 투자감소 등인데 2010년 이후로는 이중에서 투자감소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분석한 뒤 “대기업들이 현금배당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로 ‘투자재원 확보’를 들고 있지만 이 같은 수치를 보면 말이 안 되는 변명”이라고 꼬집었다. 결국 시장에서는 사내유보금 과세방안은 정부가 기업의 투자가 저해되지 않을 정도의 적정한 유보율을 설정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